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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14-21]

  • jamsilyouth
  • 2016년 9월 30일
  • 5분 분량

14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전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마치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인 놋뱀을 보기만 하면 살았던 것과 같다(민21:9).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13절의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누구든지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어찌 부르리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에서 나왔다. 기도 속에서 부르는 행위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부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경 바디메오는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주님을 불렀다(막10:47). 그의 주님을 부르던 행위는 바로 믿음에서 비롯되었고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한 것이다(막10:52).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믿음이 생길 수 있는가? 그 다음 구절로 이어진다.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우리는 누군가를 전도할 때 주로 교회에 함께 나가는 것으로 그치는 때가 많았다. 교회에 가면 믿게 될 것이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교회에 나가기만 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교회에 나가면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 속에 있는 전도대상자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취하는 데에는 많은 장애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였지만 믿음을 갖지 못한 이들이 많은 현실을 바라볼 때 교회에 이끄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전해야 한다. 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가 믿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교제할 때에도 우리는 복음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증거해야 한다. 소그룹 모임의 가장 큰 사역은 바로 이것이다.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또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전파하는 자’는 헬라어 ‘케륏소토스’이다. 헬라어 ‘케륏소’의 뜻은 ‘가르치다, 알리다’이다. 이 단어는 아무 때나 사용되었던 단어가 아니다. 특별히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전령이 공개적으로 알릴 때에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이 때에는 왕의 명령 외에 그 어떤 말을 가감할 수 없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는 역할만 했던 것이다. 이 단어는 사도와 서지자들 조차도 특별히 메시아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만 한다. 설교자는 성경말씀과 해석의 말을 전할 때에 다른 것을 덧붙이면 안된다. 그는 강단에 섰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오직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비단 설교자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생각과 상식을 덧붙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만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식대로 믿는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을 알리고 가르치는 것은 성도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하는 일들이다. 그 이유는 전파하는 자가 없어서 저들이 듣지 못하고 믿지 못하며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케릿소’가 사용되었던 배경에서와 알 수 있듯이 특별히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종말론적인 일들에 대해서 전해야 하는 것이다. 저들에게 죄와 사망에 대하여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증거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구속과 하나니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전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전도의 방법론에 대하여 각기 다른 주장들을 한다. 직접전도, 즉 복음을 전하는 일들에 대한 무용론을 주장한다. 문화선교, 이미지 선교 등,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교회에 대하여, 기독교에 대하여 호감을 갖게 하는 방식의 선교에 집중을 한다. 또는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그들을 교회로 초청하려 한다. 물론 역사적으로 성도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돌아오기도 했다.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교회에 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선교방법론은 상황에 따라 어느 정도 유용하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전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소유하지 못한 명목상의 크리스천만 양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5절.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역설하고 있다.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에서 나온 말이 ‘아포스톨로스’, 즉 ‘사도’이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에게 권위를 주고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를 부끄러워하거나 자신없어 하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이론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부여하신 권위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일들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이 구절은 이사야 52장 7절을 인용한 것이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 중에 있을 때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의 말이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을 구출하라던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러 걸어가던 모세의 발을 생각해보라. 고레스 치하에서 포로로 살던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러 걸어가던 선지자의 발걸음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복된 발인가? 그 발은 춤을 추며 걸었을 것이다. 그 발은 그의 백성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가져다 주는 발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바로 이러하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발이다. 의기소침한 발이어서는 안된다. 기쁨과 즐거움과 자부심과 떳떳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들을 살리는 복되고 아름다운 발인 것이다.

16절~21절.

-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유대인들은 전파된 복음을 대부분 믿지 않았다. 이사야 53장 1절을 인용하여 이사야가 전파한 것도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을 언급한다. 믿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복음 들었음에도 마음을 열지 않는 그들에게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친히 복음을 전하였음에도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거부하였으며 오히려 주님을 미워하였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이러한 대우를 받게 될까 두려워 한다. 그러나 예수님도 그리하셨고 사도들도 동일하게 경험하였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라고 반문한다. 그것은 자신들은 복음을 듣기는 들었으나 깨닫지 못했으므로 거부했다는 반문, 또는 핑계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을 염두해 두고 한 말이다. 유대인들은 복음의 의미와 그 불순종에 대한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하였고 마음에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 대하여 바울은 모세의 노래 중 일부(신32:21)를 인용함으로 거역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거부를 당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에 집중하여 낙심치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과 상한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사야는 더 나아가 담대하게 선포된 말씀을 확증하는 선언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20절, 사65:1).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인간의 사상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위임받은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권위를 주셨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복음만을 전해야 한다. 인간의 사설이나 다른 방법론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거부당할까 두려워하여 인간적인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용기를 가져야 한다. 선지자도 사도들도 예수님도 거부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만을 전하였다.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에 거부당할 것에 대해 염려하거나 의기소침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다. 마음이 상하여 낙심하지 말라. 거부당하신 하나님의 감정을 들으라. 그분이 행하시리라. 오직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만 생각하라. 산을 넘고 광야를 지나 포로된 백성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는 우리의 발은 아름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인정하신다. 그것이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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